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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문동’의 문을 열다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7년부터 <포스트제국의 문화권력과 동아시아>라는 연구 아젠다를 내걸고 국내외 연구자들과 함께 활발한 학술활동과 공동연구를 진행해왔다. 일반적으로 정치, 경제적으로는 이미 제국주의 시대가 끝났다고 본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제국일본이 해체된 이후에도 제국시대와의 연속성과 단절을 둘러싼 기억과 욕망이 잠재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 사업단은 이와 같은 제국의 기억과 욕망이 포스트제국 시기에도 ‘앎ㆍ지식’, ‘매체ㆍ문화’, ‘일상ㆍ생활’을 포함하는 문화 영역에서 작동되고 있으며 이는 동아시아지역에서 나타나는 상호불신과 혐오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연구 아젠다를 설정하고 있다.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 사업단은 구체적으로 제국일본의 침략과 지배에서 작동했던 문화권력이 포스트제국 시기에서는 어떻게 변용되어 지속되고 있는지, 그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규명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더불어 단순히 위로부터 구조화하려는 힘뿐만 아니라 제국의 욕망과 기억에 대응하여 동아시아지역 사람들이 전개하는 경계횡단적 변이, 전유, 분기, 환류 등 길항의 경험을 발굴하여 대안적 성찰의 계기로 삼을 것을 추구한다. 더 나아가 포스트 제국시기 문화권력의 좌장과 메커니즘을 규명함으로써 동아시아지역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구체적인 원인을 극복하고 진정한 화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인문학적 전망을 수립, 제시하고자 한다.
대중문화 속에 묻힌 “패전”의 기억들
이 책은 미국 밴더빌트(Vanderbilt University)대학 역사학과 이가라시 교수가 미국대학생을 대상으로 일본역사를 가르쳤을 때 고민했던 부분―침략, 지배국이었던 일본이 1945년 이후 ‘평화국가’로 탈바꿈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의 부재―이 계기가 되어 1950년대 패전직후 당시 사회변화를 분석한 문화연구 서적이다.
저자 이가라시 교수에 의하면, 일본은 아시아ㆍ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후 더 이상 정치영역에서 ‘국민’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기 어려웠다. 대신 대중문화 영역에서는 과거에 대한 여러 기억과 망각의 욕망이 경합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특정 과거를 기억하고 싶은 욕망과 잊고 싶은 욕망의 충돌을 흔히 알려진 일본 문화 가운데 괴물영화를 대표하는 <고질라>, 프로레슬링 선수 역도산, 1964년 도쿄 올림픽,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나 노사카 아키유키(野坂昭如)의 문학작품 등에서 찾아냈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 저자는 특정 과거를 기억하려는 힘이 또 다른 과거의 망각을 도모하는 문화권력의 모순된 양상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저자는 두 지점을 강조한다. 첫째, 기억이란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성을 띤다는 점이다. 그래서 책에서는 기억을 둘러싼 권력의 장으로서의 신체(몸)를 분석한다. 둘째, 과거란 어떻게 이야기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고 인식된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힘에 주목하여 기억을 둘러싼 문화정치를 파헤쳤다. 이 책은 제국일본이 해체된 후 새로운 국민국가로 ‘복귀’ 하려는 과도기에 대중문화 영역에서 제국의 욕망과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고 그것이 사람들의 기억, 망각, 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권력의 메커니즘 분석을 제시하였다.
‘단절’된 과거와 현재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 사업단 연구진은 번역작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가라시 교수와 직접 대담하는 기회를 가져 책 내용과 저자의 관점을 확인하였고, 그 외 에도 여러 번에 걸친 회의와 워크숍을 통해 단순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번역서 발간 의의에 대하여 심도 깊은 토론을 진행하였다. 옮긴이 후기에도 언급했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전쟁’과 ‘패전국 일본’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전쟁 전부터 연결되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라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흔히 우리가 아는 일본 대중문화가 순수한 오락을 위한 미디어도 아니며 그렇다고 단순한 프로파간다도 아닌, 과거와 기억을 둘러싼 충돌의 장이자 ‘과거’를 새롭게 창출하는 문화장치임을 재확인할 수 있는 텍스트로서 유용하다. 또한 이 책은 문화연구 저서이기에 저자가 사용한 이론적 틀과 분석방법을 참조하여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기억의 문화정치를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그간 일본과 한국 사이의 정치, 경제 관계는 ‘단절’에 가까운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거기다 코로나로 인하여 오프라인 여행과 각종 민간교류 기회도 줄고 있다. 양국 간 시민들의 온라인과 SNS 등을 통한 교류는 무시하지 못하지만, 일본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편파적인 호기심에 그쳐 있는 현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현재 일본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은 패전 직후 일본 대중문화 영역에서 어떻게 과거의 기억과 망각이 전개되었는지, 아울러 그것은 식민지 피지배자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