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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권력’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고 탐구하다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는 2008년부터 2017년까지 9년에 걸친 <제국일본의 문화권력: 학지(學知)와 문화매체> 연구사업(한국연구재단 중점연구소지원사업)을 완수하고, 바로 뒤이어서 2017년부터 2024년까지 7년 계획으로 <포스트제국의 문화권력과 동아시아> 연구사업(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플러스, HK+)을 수행하고 있다. 두 국책사업을 통해서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는 ‘문화권력’이라는 일관된 문제를 16년 동안 집중적으로 다루게 되는데, 전자는 제국일본을 대상으로 한다면, 후자는 1945년의 제국의 해체를 기점으로 구·제국이 존재했던 공간에 건설된 각 국민국가를 대상으로 한다. 이 연구는 이미 해체된 제국의 유제(遺制)가 이후에 건설된 각 국민국가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거부되었으며, 또한 변용되었는가, 또는 권력에 의한 구조화와 민중의 저항은 어떤 동태를 보였으며, 이를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탐구한다. 즉 ‘문화권력’이라는 칼로 칼집을 내어 그 단면에 드러나는 연속성과 비연속성, 권력에 의한 구조화의 요구와 민중의 저항, 역류와 환류를 비롯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에는 식민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가 종식을 맞이한 전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1945년이지만, 이후, 지하로 숨어 은폐되어 있던 제국주의적인 욕망이 꿈틀거리며 다시 부상(浮上)할 호기(好機)를 노리는 시대적인 움직임을 주시하는 시선이 중심에 있다.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즈음에 미국이 America First를, 중국이 奮發有爲를,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를 외쳤던 것이 바로 그것이며, 이러한 움직임은 오늘날 러시아에 의한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어지고 있다. 20세기를 보내면서 새 밀레니엄을 축하했던 세계가 바라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매우 실망스러운 현실을 앞에서,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인문학, 한국의 일본학은 동아시아의 화해와 협력, 공존이라는 문제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제언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이 아젠다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식민지 지배국, 가해국이 아니라 피지배국이자 피해국이기에 더 떳떳하고 호소력과 자신감을 가지고 가해국을 포용할 수 있는 화해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로움이 우리에게는 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젠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더 이상 가해국이 보이는 태도 하나하나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역사의 아픔을 극복하고 미래를 바라보고 우리 스스로 발전하기 위한 전진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이 아젠다는 이를 준비하기 위한 작은 한 걸음이 되리라 믿는다. 그날이 올 때 우리는 마음속에 깊은 상처와 분노로 각인된 식민지 지배의 아픔과 굴레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패전을 앞두고 사라진 『일본급일본인』의 복각본
이러한 의지를 품은 이 아젠다를 수행하기 위해서 본 연구소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1945년 패전 직후, 일본은 ‘일본’과 ‘일본인’이라는 그들 자신에 대한 아이덴티티와 세계관을 어떻게 재구축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와 관련해서 사업단이 주목한 것이 1888년에 ‘국수주의’와 ‘일본주의’를 주장하며 간행된 잡지 『일본인(日本人)』, 1889년에 창간된 신문 『일본(日本)』, 1907년에 창간되어 1945년 2월까지 호를 이어간 잡지 『일본급일본인(日本及日本人)』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매체는 서로 형제 관계에 있는데,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신문 『일본』과 잡지 『일본인』이 합쳐서 ‘일본 및 일본인’이라는 뜻인 『일본급일본인』이 된 것이다.
『일본』과 『일본인』은 각각의 제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수주의’, ‘일본주의’를 주창하는 지식인, 언론인에 의해서 창간되었는데, 메이지 정부가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는 등, 근대 국민국가 건설에 박자를 가하면서 서구열강의 사상과 문물,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과정에서 서구 숭배에 가까운 풍조가 만연하자, 이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일본 고유의 것 즉 일본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비판을 가한 그룹이 이들이다. 이들이 주장한 ‘국수주의’, ‘일본주의’ 또는 ‘국수 보존주의’는 “철두철미하게 일본 고유의 구식 분자까지 보존해서 구식 원소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서양의 개화(=문명)를 수입할 때 일본국수(日本國粹)인 위장으로 잘 씹어서 소화해서 일본이라는 신체에 동화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에서처럼, 서구열강의 문물 수입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신체론을 전개해서 몸통과 부속 장기를 ‘일본 고유의 것’ 즉 본체로 보고, 서구열강에서 수입하는 개화, 문명은 섭취하는 선택적인 영양소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섭취한 것들을 잘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과 일본 국민에게 주어진 책무이고 일본의 국수를 보존하기 위한 일본과 서양(문물)의 관계라는 것이다. 구가 가쓰난(陸羯南),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昴),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 등에 대표되는 이들의 주장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고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제국일본이 파쇼군국주의 변모하고 총력전체제로 돌입하면서 오로지 국체보존(國體保存)을 위한 보국(報國)으로 동원되면서 변질한다. 결국 패전을 6개월 앞둔 시점에 여느 잡지와 마찬가지로 『일본급일본인』도 1945년 2월을 끝으로 사라지고 만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패전국 일본은 GHQ(SCAP / General Headquarters,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점령하에서 파시즘 군국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한다. 그 과정에서 일본과 일본인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해서, 아시아와 세계에 대해서, 그리고 ‘일본인’이라는 자아에 대한 인식을 재구축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과정은 메이지유신에 이은 두 번째 국가건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패전으로부터 정확하게 5년이 되는 1950년 9월 『일본급일본인』이 복간된다. 잡지 『일본인』이 근대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국수주의’와 ‘일본주의’를 주장했던 것처럼, 신생 일본이 국제무대에 복귀해서 다시 독립을 회복할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조약 체결을 앞둔 시점에 다시 ‘일본주의’가 고개를 들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것이다.
이번 해제작업은 복간된 1950년 9월호부터 1951년 12월호에 게재된 논설 기사를 대상으로 하였다. 여기에는 패전을 앞두고 사라진 『일본급일본인』이 어떠한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패전 5년만에 복간되었는가? 그들의 목표와 취지는 1950년대, 1960년대라는 세계적인 격동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실천되고 좌절하고, 또한 변용되었는가? 일본이 파쇼군국주의에서 민주국가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정리해야 하는 국내외적인 문제, 국제무대 복귀와 국익을 위한 계산과 전략, 이를 뒷받침할 국내 정치와 경제, 사회의 재건은 총력전체제 아래에서 국체를 보존과 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통합과는 또 다른 목적의 국민통합이 필요한 국가재건의 시기였다. 이번 해제작업은 당시 일본을 선도한 지식인, 사회지도층이 이 과정에 어떤 태도와 생각으로 임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증적 실천이 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새로 국가를 건설하면서 지난 전쟁과 침략, 식민지 경영 등의 이른바 ‘부(負)의 유산’을 신생 일본이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였는지, 한국전쟁과 냉전체제 속에 어떤 세계관, 아시아관, 한국관을 보였는지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 일본이 보이는 역사수정주의가 태동하는 원점을 알아본다는 점에서도 유익할 것이다.